[오마이뉴스] 2024. 10. 14. 누구 엄마, 누구 아빠가 아닌 ‘나’로 육아하는 곳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4-10-21 11:29 조회108회 댓글0건본문
[와글와글 공동육아⑤] ‘부모’라는 정체성이 힘겹지 않도록
[기자말]
지금, 여기 서울 한복판에서 ‘공동육아’라는 이름으로, 서로 돌봄하는 어린이집 협동조합이 있습니다. 바로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있는 참나무 어린이집입니다. 참나무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키운 부모들이 공동육아의 살이와 공동체의 복원을 이야기 하려 합니다. 이 글은 참나무어린이집의 부모 조합원, 미니가 쓴 글입니다. 미니(김민희)는 7세방 엄마입니다. -기자말
아이가 찾아와 처음 산부인과에 갔을 때, 내 이름 대신 '산모님'이라 불렸던 순간을 기억한다. 생소하고, 간지럽고…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름을 잃었다. 산부인과, 조리원을 거쳐 아이와 함께 가는 모든 곳에서, 마치 '손톱깎이'나 '빗자루'처럼 기능이 곧 내 이름이 된 것 같았다.
내 이름을 잃자 반짝반짝하던 나의 빛도 잃어갔다. 자연스레 '엄마'란 이름이 당연한 곳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문화센터보다는 뒷산에 갔고, 맘카페는 가입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이가 처음 '엄마'라 말했을 때, 누군가에게는 최고로 행복하다는 순간에 나는 마음 한편이 묵직했다. 모성 없는 엄마인 것 같아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아이가 18개월쯤 되었을까. 어느 날 동네 산책을 하는데, 잘 걷던 아이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반대편에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낯가림이 조금 있었지만, 아이는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는 듯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의 고립된 생활과 내 감정이 아이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살짝 미친 사람처럼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안전하고 좋은 곳이야, 마음놓고 다가가도 된단다'를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부담스러운 연기를 펼쳤다.
'ㅇㅇ엄마'가 아니라 '나'로 나누는 인사
집을 이사하고 환경이 바뀌어 29개월 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했다. 본격적인 엄마 연기가 시작되겠구나 싶었다. 애매한 시기에 이사를 해 국공립 어린이집은 대기가 너무 길었다.
기다림에 지쳐 다른 기관을 알아보던 중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알게 됐다. 코로나 시기였지만 최대한 일상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고, 부모들이 어린이집 운영에 직접 참여하는 점도 불안 높은 내게 오히려 도움이 될 것 같아 등원을 결정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에는 부모들이 '누구누구 어머님, 아버님'이 아니라 각자 별칭을 사용하는 문화가 있었다(이전 기사를 봐도 '토마토', '배코' 등이 부모들의 별칭이 나온다).
아이들도 교사와 부모를 부를 때 친구를 부르듯 별칭을 부르고 평어를 쓴다. 교사와 부모 사이에도 존대는 하지만 별칭으로 서로를 부른다. 평등한 언어를 토대로 위계적이기보다는 서로를 존중하는 평등한 관계를 추구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나는 '미니'다. 어린이집에서 자기 소개를 할 때 '저 ㅇㅇ 엄마인데요.'에서 끝나지 않고 '저는 ㅇㅇ 엄마 '미니'예요.'하고 '나'로서도 인사를 나눈다.
온라인에서나 쓰던 별칭을 어린이집에서 쓰다니. 누군가에게는 무척이나 어색하고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나는 '누구 엄마'로 불리는 것보다 별칭인 '미니'로 불리는 것이 더 편안했다.
별칭에는 성별도 없다. 자연히 아빠, 엄마라는 말로 규정지어졌던 고정적인 역할 프레임도 느슨해진다. 따라서 외부에서 주어지는 압박보다 자율적으로 육아에 참여할 수 있어, 남 눈치 덜 보며 나의 성향대로 육아를 대할 수 있었다.
'미니'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며 얻게 된 새로운 자아이지만, 엄마로서의 자아뿐 아니라 그 외 영역의 내 정체성도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자아였다.
별칭을 가진 부모는 본인의 자아로 관계 맺으며 아이와 함께 어린이집 생활을 한다. 따라서 아이, 부모, 교사 간의 관계 맺음이 다채롭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부모가 직접 살림을 맡기 때문에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다른 아이의 부모가 팀 동료처럼 느껴진다.
누군가와는 아이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 누군가와는 취향을 공유하며 최근 읽은 책과 생각을 나누거나 저녁에 함께 달리기를 하기도 한다. 단순히 아이 엄마와 담임 선생님으로 만났다면 하지 못했을 이야기를 '미니'와 '반달(현재 아이의 담임 선생님)'은 나눌 수 있고, 아이 엄마와 아이 친구 아빠로 만났다면 나누지 못했을 이야기를 '미니'와 '배코'로 만나니 나눌 수 있다.
이렇게 어울려 지내다 보니 다른 부모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모임에서 부모들을 만나면 같은 사람임에도 자리에 따라 각기 다른 자아가 보인다.
부모라는 역할이 한 사람 안에서 진해지기도 하고 옅어지기도 하면서 나타나는 다양한 모습이 참 재미있고 보기 좋다. 누군가는 부모로서의 자아가 좀 더 편안해 보이고, 누군가는 육아 보다는 다른 영역에서 유능감을 발휘할 기회가 있을 때 좀 더 활력이 느껴진다.
자신에게 주어진 다양한 역할과 욕구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타협점을 찾고자 애쓰는 모습이 애틋하다. 이제 갓 부모 역할을 하게 된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각자가 삶의 균형을 잡아갈 수 있도록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해 주고 있었다.
육아를 위해 모였지만 부모의 역할과 책임만을 강조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나는 부모라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갔다. 내 안에 상충하는 지점들이 서로 편안히 만날 수 있는 경험을 통해 나는 나만의 균형을 찾았다.
'미니,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총총이~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이 엄마로는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부담스러웠던 인사가 이곳에서는 점점 즐거워졌다.
일상적 좌절에서 트라우마 입는 사람들
임상심리학 박사 과정에 있는 나는 최근 대학생 연구 참가자를 모집하며 정신 건강 관련 설문을 진행하다 의아한 점을 발견했다. 수십 명 학생 중 대다수의 증상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이 가능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이들 모두가 심각한 외상성 사건을 경험했을 가능성은 적다.
오히려 일상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에 비견할 만큼의 두려움과 무력감, 고통을 경험하고 있고, 이에 대한 회복이 쉽지 않다고 해석할 수 있다. 외부의 말 한마디, 좌절, 갈등 하나하나에 타격을 너무 크게 입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심한 압박감과 좌절감으로 불안에 시달리면 개인은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 이럴 때는 부정적인 정서 상태에 대한 감내력과 스스로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인 효능감을 높여줘야 한다.
갓 엄마가 된 내가 역할갈등을 겪으며 '엄마'라는 역할을 밀어낸 것처럼 회피하거나 자발적으로 고립을 선택하는 것은 증상을 더 악화시킨다. 감내력과 효능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여 그것이 생각했던 것만큼 감당 못 할 일이 아님을 느끼고, 필요한 경우 기술을 배워 역할의 과제를 시도한다. 그렇게 작은 성취를 쌓아가며 자신에게 세상에 대응할 힘이 있다는 걸 깨달아 나가야 한다.
이는 아이들이 자라며 세상에 대한 인상과 태도를 형성하는 과정과도 유사하다. 처음에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이후 관계를 점점 넓혀가며 이 세상이 자신에게 친절한 곳인지 또는 위협적인 곳인지 기본적인 인상을 형성해 간다. 어른, 또래들과 크고 작은 갈등을 겪으며 사회성을 키우고 문제해결 기술을 쌓아가며 스스로에 대한 효능감도 키운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된다는 건 부모라는 역할이 추가된 새로운 자아상을 수립하는 일이다. 낯선 역할이 추가된 '나'를 수용하고 부모 역할과 동반되는 다양한 책임을 이해하며, 양육과 관련한 다양한 기술을 습득해가는 과정이다. 이때 다양한 시행착오는 필수다. 성인 부모도 아이와 마찬가지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부모라는 새로운 역할을 흡수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부모라는 역할의 긍정적 상(像)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부족하다. 직장에서는 직장인의 역할만을, 가정에서는 부모의 역할만을 강조하는 경직된 사회 구조와 분위기가 부모라는 새로운 자아를 받아들이는 부담을 가중시킨다.
다양한 역할을 포용해줄 수 있는 공동체
우리 삶에서는 다양한 역할 변화가 끊임 없이 일어난다. 여러 역할 변화를 겪으며 발생하는 긴장과 압박감을 견디기 위해서는, 주어진 역할의 과제를 시도해볼 용기를 얻기 위해서는 심리적 완충지대로서 공동체가 필요하다. 완충지대 없이 혼자 맨몸으로 세상을 맞닥뜨릴 경우, 오히려 부정적인 믿음이 더 공고해지고 전보다 사회적으로 더 고립될 수 있다.
본인의 자아를 잃지 않으면서도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이를 체감할 수 있도록 가까이에서 지원하는 울타리가 필요한 것이다.
공동육아를 경험하며, 이 안에서는 적어도 '우리가 그래도 아이를 위한다는 같은 목적으로 모였으니 내가 너의 지지대가 되어줄게!'라는 믿음과 지지가 있다고 느꼈다.
사회가 정한 부모의 역할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 다양한 역할이 공존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여러 역할이 조화롭게 기능할 수 있도록 서로를 응원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부모'라는 역할에 담긴 무거운 책임과 압박에서 조금은 숨통을 틔워주기도 했다.
우리 아이도 앞으로 더 큰 사회로 나아가면서 여러 삶의 전환점들을 맞이하며 처음 부모라는 역할을 마주했던 나처럼 수많은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런 때가 온다면, 힘든 경험이 고통에서 끝나지 않고 성장통이 될 수 있도록, 다음 단계로 무사히 안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 가까이에 있으면 좋겠다.
다양한 자아를 존중하고 이해해주며 유연한 포용력이 있는 공동체가 모두의 곁에 있으면 좋겠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오마이뉴스(https://www.ohmynews.co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