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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 <우리 시대의 공부> 강연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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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푸른숲 작성일16-09-24 08:55 조회1,42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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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하늘공동육아 사회적협동조합

송파마을공동체교양강좌 제4강
​엄기호, <우리 시대의 공부>
청소년문화예술공간 즐거운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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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문제 / 관계의 파괴


공동육아와 대안교육의 실패의 징후가 보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
1990년대 이전과 1997년 이후 교육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현재 한국의 교육은 체계적으로 무능력자를 양산하고 있다.


삶의 외주화


신자유주의의 여파로 삶의 외주화가 진행되고 있다.
삶의 외주화의 양상들.
- 학생들은 대학이라는 '성과'을 이루기 위해 입시공부를 제외한 모든 것을 외주화한다.
("넌 그냥 공부만 하면 돼")
- 부모들 역시 기업에서의 '성과'를 위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진지 오래다.
(가사의 외주화, 육아의 외주화, 가족부양의 외주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답변할 수 있는가?


1990년대는
신분상승이 가능하던 시대였다.
공부의 쓸모가 있던 시대였다.
교사의 권위가 있던 시대였다.
근미래(곧 도래할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는 것이 가능하던 시대였다.
삶을 바라보는 기준점이 현재에서 곧 도래할 미래로 바뀌는 시점이 있었다.
이게 가능하려면 근미래에 대하여 예측이 가능해야 한다. (계산가능성)


project / reflect


project : 앞으로 내던지다
reflect : 자신을 타자화하다
자신을 앞으로 내던져볼 기회를 가져야 한다.
자기 자신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도 일등주의자가 아닌가?


"너는 너만 생각하는구나."


1990년대의 '신분상승'이란 가족의 신분상승을 의미한다.
응답하라 1988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1997년 이후 공부(지식)의 쓸모가 바뀐다.
1990년대의 교육의 패러다임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였다.
꿈을 묻는 부모상/교사상이 바람직한 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생존주의


혁신학교의 방향에 대한 의문 : 한 발 늦었다. 지금은 다른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훌륭한 사람(=관계에 책임을 지는 사람, 집단주의적 사고)이 되라"는 말이 사라지고
그 대신 "행복한 사람(=자기 본위적 사고, 나쓰메 소세키)이 되라"가 교육의 목적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지금 이 시대 공부의 목적은 생존이다. (생존주의)​
90년대 중반 이후 교육담론에 무기력, 교실붕괴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는 학교에서만 무기력한 아이가 아닌
'어디에서나 무기력한 아이(총체적 무기력)'가 탄생하고 있다.


성과주의 / 생존주의


"내가 과연 미래에 내 부모처럼 살 수 있을까?"
새로운 '성적지상주의'가 등장한다. 학생이 곧 성과사회의 주체가 된 것이다.
성적지상주의의 가장 큰 폐단은 '연애'에서 터져 버린다.
데이트 폭력, 스토킹 등은 연애조차도 성과주의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발생하는 문제다.
대학의 상대평가 역시 학생들의 성과주의를 부추긴다.
성과 중심의 생존주의 사회에서 총체적 무기력은 시간의 문제다.
우울증, 분노조절장애, 공황장애 등이 젊은이들에게 확산되고 있다.


​대안학교의 위기


대안학교의 위기는 경험이 체험으로 둔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넘쳐나는 체험 속에 경험의 빈곤을 맞딱뜨리고 있다." (발터 벤야민)
학교의 테마파크화가 진행되고 있다.
놀이터 같은 학교가 아닌 공터 같은 학교가 되어야 한다.
어느덧 공터가 놀이터도 바뀌더니 이제는 놀이방이 되어 버렸다.
위험요소가 제거된 놀이방에서 아이들은 위험에 대한 감각을 기를 수 없게 된다.
공터에서 노는 아이들에게는 가장 큰 공포는 친구가 "재미 없어. 집에 갈래"라고 말할 때이다.
창의성은 공터에서 나온다. 재미있는 놀이를 제안할 수 있는 능력이 창의성이다.
경상도 방언 "강구야"의 의미 - 독점이 불가능한 놀이방식


역량의 문제


한나 아렌트는 세 가지 역량개념을 설명한 바 있다.


- 노동(labor)역량 > 임금
- 작업(work)의 역량 > 작품
- 활동(action)의 역량 > 공동의 세계


​과거의 대안학교가 작업의 역량을 강조했다면 이제는 활동의 역량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활동의 역량은 공동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끊임없이 모의하고 작당하다하는 능력이다.
신뢰를 끌어내기 위한 역량이다.
어린이집은 소비의 공간이 아닌 활동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리처드 세넷은 '활동의 역량'을 '소통의 역량'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협력을 이끌어내는 기술을 의미한다.
협력을 이끌어내는 기술의 핵심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제안해내는 능력이다.
부모/교사가 제안하지 말고 아이들이 스스로 제안하게 하라.
이게 '망한민국'을 구원할 유일한 길이다.


세 가지 제안.


1. 비워라. 공터를 만들어라.
2. 협력을 이끌어내는 기술을 '공동체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3. 중층적 생태계를 구성해야 한다. 아이들이 이질적 집단과 만나게 하라.


이상적 인간형


이상적인 인간형이 '훌륭한 사람'에서 '행복한 사람'으로 바뀌었다가
이제는 다시 '행복한 사람'에서 '탁월한 사람'으로 바뀌고 있다.
탁월한 사람이란 무엇인가?
공동체를 만드는 사람, 협력을 이끌어 내는 사람, 곁을 만들 줄 아는 사람, 참조점이 되는 사람, 조언을 해주는 사람.
그가 바로 탁월한 사람이다.


​마을 공동체


마을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곁을 만드는 일이다.
곁이 없다보니 뭔일만 생기면 검색을 한다.
최근에 대안학교에서 '지식교육'을 등한시 하는 경향에 대하여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스스로 "우리는 너무 무식해"라고 말하고 있다.
왜 공부하는가?
가장 큰 이유는 지식이 주는 쾌감 때문이다.
그 쾌감이란 곧 '분별력'을 의미한다.
들에 핀 꽃을 보고 그들을 분별할 때의 쾌감을 상상해보자.
맑은 밤하늘에 별을 관찰하고 그들을 분별할 때의 쾌감을 상상해보자.
나는 대안학교에 보통 심마니 학교(들풀 관찰)와 천문학 학교(별보기)를 제안한다.


장강명, <표백>이라는 책이 있다.
세균이 없는 세상. 그것이 표백된 세상이다.
아이들을 표백된 세상에 가두려 한다. 그것이 안전이라고 믿으면서.
그것은 아이들이 스스로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는 것이다.
아이들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이들 사이에 발생하는 충돌과 갈등을
어른의 언어로 재단하려 한다.
("그거 성폭력 아니야? 그거 집단 따돌림 아니야?")
아이들이 아픔을 겪고 스스로 극복해낼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서로 둥글게 마주앉아 서로 소통하는 데서 출발한다.
신뢰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댓글목록

운영자님의 댓글

운영자 작성일

강의를 듣지 못했어도 매번 공유해 주시니 도움이 됩니다.

공동육아 페이스북에 공유하였습니다.

 

 

https://www.facebook.com/gongdong/posts/10959448204748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