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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밤, 우리가 산 정상에 텐트를 친 까닭 -이숙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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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콩쥐 (180.♡.211.63) 작성일03-02-04 16:13 조회4,0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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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밤, 우리가 산 정상에 텐트를 친 까닭
[성미산 일기 1] 왜 죄없는 성미산을 죽이려 하나요

이숙경 기자



▲ 엄동설한에 텐트를 치고...

ⓒ2003 이숙경

늦은 저녁상을 물리고 산에 올라와 보니 어디서 저런 힘들이 나오는지. 낮에도 하루 종일 산에서 홍보지 나눠주고, 애쓰던 사람들이 또 모여 앉아 있었다.

"집에 있어도 마음이 편치가 않아요..."

소주 댓병을 들고 올라온 해솔이 아빠가 빙긋이 웃으며 오징어를 굽는다. 타닥 타닥. 둥그런 화덕에 조개탄이 벌겋게 타오르고, 오징어가 오그라든다.

"야, 꼭 엠티 온거 같네!"

밤 열시가 넘었는데 윤진이네 부부는 애까지 데리고 텐트를 찾았다.
마포구 성산동에는 야트막한 야산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야 성미산. 이 산에서 우리 동네아저씨들이 추위에 떨며 이틀째 야영을 하고 있다.

"자, 한 잔 받아요."

음하하. 산사춘이다. 성미산 배수지건만 아니면 이 얼마나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연휴의 막바지 밤이냔 말이다. 다들 고향갈 준비에 정신없는 틈을 타서 산에 있는 나무들을 싹 베어버리는 바람에 동네에 난리가 났다.

연 이틀 텐트에서 밤을 보낸 권범이 아빠가 풀죽은 목소리로 "어제 방송국 사람들이 다녀갔는데... 데스크가 잘랐대요. 적법성에 문제가 없는지 확신이 안 선다구... 서울시에서 절차상 잘못한 부분이 없는 거 아니냐며 기사화하기 곤란하다네요"하며 핸드폰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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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활기를 찾으려 두런거리던 사람들이 권범아빠가 전한 비보에 일순 조용해졌다. 적법성이라. 성미산 소쩍새와 꾀꼬리, 박새, 오색딱다구리들이 터전으로 삼던 수많은 나무들이 죽어가는데...

평범한 서민들이 아침에 편안히 산보하고 운동하는 곳인데. 아이들이 매일 나들이 삼아 산에 올라 나무 한 그루, 언덕 하나에도 다 이름 붙여 놓은 곳인데. 나무 계단 하나, 운동기구 하나 하나 산에 정붙인 사람들 정성이 가득한 곳인데...

잘려 나뒹구는 나무들 옆에 세워진 텐트 주변엔 동네 어른, 아이들이 만들어 걸어놓은 포스터들이 빨래줄처럼 걸려 있다.

'성미산 사랑해', '아저씨, 성미산 죽이지 마세요', '우리가 물 좀 아껴쓰면 되는데 왜 죄없는 성미산을 죽여요!'

우리 동네 뒷산 '성미산'은 마포지역에 유일하게 남은 생태림이다. 7,8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에도 동네 뒷산들이 있었다. 저녘 무렵 솔개가 날고, 가을엔 잠자리를 잡던 곳. 엄마 회초리를 피해 도망가 숨던 산등성이들이 배수지, 아파트로 변해 사라진 지 오래.

그나마 하나 남은 마포 성산동 뒷산 '성미산'이 지난 29일 새벽 아무도 모르게 벌목을 당했다. 잘려진 나무들이 성냥개비처럼 나뒹굴며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놀이터 한자락 없는 도심 한복판에서 아이들이 강아지처럼 맨발로 뛰놀고, 평범한 서민들이 새벽에 황토를 밟으며 건강한 숨을 내쉬며 달릴 수 있게 해주던 바로 그 나무들이 죄다 쓰러져 나뒹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 나무가 잘려나간 성미산

ⓒ2003 이숙경

그날 이후 동네 아저씨들은 산 정상에 텐트를 세웠다. 밤에도 스티로폴 한 장 깔고 텐트에서 새우잠을 자고, 낮에는 동네사람들과 구청, 시청 다니면서 기습적인 벌목을 막아보려고 발품을 팔았다. 말로는 배수지와 함께 공원도 만들어준다고 하지만, 두꺼운 시멘트로 뒤덥힌 배수지 위에 지금처럼 30년 묵은 나무들이 무럭 무럭 자랄 리 만무하고...

한여름에는 지리산 골짜기가 부럽지 않을 만큼 수목이 우거진 작은 뒷산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시멘트와 철기둥으로 세워진 놀이터에 비교할 수 없이 재밌는 숲속의 작은 공터들이 사라진다면, 우리 아이들은 봄이면 성미산에 어떤 꽃들이 피어나는지 기억할 수 있을까?



▲ 봄마다 개나리 가득한 성미산에서 놀곤 했던 우리 아이들.

ⓒ2003 이숙경
봄이면 성미산에 피던 꽃들

담장 위의 목련
성미산 개나리, 성서초등학교에도 있지요
다솜 놀이터의 벚꽃, 노란 산수유
어린이집 마당 앵두꽃
목련이 질 때쯤
집집마다 보라색, 하얀색 라일락
성서초등학교의 연두빛 은행잎
성미산 자락 밭에는 무꽃, 유채꽃, 마늘꽃.
산 가장자리에 철쭉, 진달래, 애기똥풀 노란꽃, 보라색 제비꽃
산 여기저기 하얀색 섬제비
성서초등학교 앞뜰에 명자나무 붉은 꽃
5월에 어린이집 당실방 창아래 진분홍 목단
6월에서 7월
성미산의 아카시아
하얀 찔레꽃
붉은 덩쿨 장미
아카시아가 다 지고 찔레내음과 장미내음이 가득하다.
성미산에는 빨간 뱀딸기, 계란꽃, 하얀 시계풀
학교가는 길 자귀나무 흰색, 분홍색 꽃술
무궁화
하얀색, 보라색 도라지꽃
동네에는 축축 늘어져 흐드러진 주황빛깔 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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