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범이라크통신(3월2일)/전쟁보다 더 위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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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inida29 (180.♡.211.63) 작성일03-03-05 04:07 조회3,885회 댓글0건본문
출처: http://cafe.daum.net/gibumir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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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보다 더 위험한 용기"
-박기범(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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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많이 무거웠다. 요르단에서 체류할 때부터 쌓여온 피로가 겹으로 쌓여있다. 집에서 지내는 거라면 벌써 몸살이 왔을 법도 한데 다행히 그 정도로 풀어지지는 않았다. 절로 버티게 되는 힘, 그것이 우리 팀 안에 있다. 그리고 이곳 이라크에 있다.
어젯밤에는 술을 많이 마셨다. 처음에는 팀장님과 따로 이후 결단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술을 마셨고, 방을 옮겨 혁 선배와 승로가 정부 요원들하고 술을 마시는 자리에 가서 더 마셨다. 여느 때하고 달리 금세 취했다. 마시는 동안에도 내가 취했구나 하는 자각이 있기는 했지만 스스로 제어하지 못했다. 다시 방을 옮겨 팀원들이 모여 있는 신부님 방에서 마셨다.
얼핏 드는 기억에 그 방에서는 전날 밤 신부님이 따로 걱정하던 이야기가 그 자리의 주제인 모양이었다. 긴급하게 예측되는 이곳의 상황, 보이지 않게 다가오는 개전의 분위기…….
계속 쌓이는 피로에 술까지 마셨으니 몸이 천근만근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깊은 잠에 들지 못했고, 서늘한 아침 기운에 눈이 떠지면서 바로 일어났다. 오늘은 아침을 좀 더 서둘러야 했다. 아침을 먹은 뒤 바로 숙소를 옮겨야 했으니 짐을 다시 꾸려야 한다.
아침을 먹고 만소우 호텔을 나와 쟈하라 알 카리쥬 호텔에 짐을 풀었다. 오히려 고급 호텔인 만소우보다 이곳이 더 편안하고 좋은 분위기다. 둘씩 드는 고급 침실이 아니라 넷 혹은 다섯 씩 민박 시설 같은 곳이다. 끓여 먹을 수 있는 부엌이 있어 좋았고, 여러 사람이 모일 수 있는 마루가 있어 좋았다. 우연케도 만소우 호텔에 들던 때부터 우리 팀 사이에 팀웤이 조금씩 흔들린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침실 방에 둘씩 들어 생활해야 한 것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팀원 모두를 존중하면서, 모든 팀원들의 합의를 거쳐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 하지만 팀원들은 저마다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자유롭게 내놓고 이야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 보이지 않게 생겨난 개인 사이의 틈. 거기에 대면 숙소의 문제는 부차적인 거였다. 어쩌면 핑계 같은 것.)
이제 새로 옮긴 숙소에서는 암만에서 생활할 때처럼 아무렇게나 서로의 방에 드나들며 얼굴을 볼 수 있고, 때때로 마루에 모여 얘기를 나눌 수 있다. 어떻든지 이곳에서 우리는 결국 기댈 사람이 여기에 있는 사람들뿐이고, 어떻게든 모든 팀원들이 한 우물에서 나오는 물처럼 마음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관광 일정. 이것 좀 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이라크라는 나라는 전시가 아니어도 본디 외국인 입국이 자유롭지 못한 곳이고, 관광비자로 팀을 짜 들어오면 관광청에 보고를 하고 짜여진 일정대로 움직여야 한다. 빌어먹을! 몸이 무거워 움직이기 싫은 것도 싫은 거지만 지금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기껏 줄맞추어 다니는 관광객이 되어 버스에 실려 다녀야 한다니. 불평해보아야 소용없다는 건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일단 기본적 관광 일정에는 순진한 관광객의 모습으로 충실하면서 정부 요원들의 긴장을 풀어 그 사이에 최대한 할 수 있는 활동을 찾아 하는 것.
운이 좋은 건지 뭔지, 관광 일정을 위해 버스에 오른지 삼십 여 분이 지나 가이드가 오전 관광 일정을 취소해도 되겠느냐 물어왔다. 그 이유란 것이 정부 요원들이 지난 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몸이 좋지 않다는 거였다. 우리로서는 나쁠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따로 자유로운 활동 시간까지 얻을 수는 없었고, 조금 멀리 떨어진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일정 체크를 한 것은, 앞으로 A팀이 요르단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겨우 이틀, 그 이틀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일단 그 사이에 휴먼쉴드나 IPT에서 잡아놓은 행사 계획은 없다. 먼저 오늘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3시부터 IPT 회장인 캐쉬캘리를 숙소에 초대해 간담회를 하기로 약속했다는 것, 나머지 이틀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루 정도는 우리 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이 독자로 준비하는 활동 하나를 하자는 거였다. 바로 내놓은 의견은 어제 우리가 행진을 마친 타흐르 광장에서 우리가 계획했던 페이스 페인팅이나 걸개그림 만들기를 해보자는 것. 몇 가지 우려되는 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기로 했다. 일부러 아이들이나 사람들을 모아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자칫 위험할 수 있으니 우리끼리 걸개를 그리자는 것, 그리하면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비롯한 이라크 사람들이 모여들 거고 그리되면 모여든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함께 만들지는 것.
그리고 한 편에서는 아이들 얼굴에 페이스페인팅을 하고, 또 뒷편 잔디밭에 내려가 아이들과 함께 작은 운동회를 하자는 것. 어제 광장의 분위기나 지금껏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난 느낌에 비추면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예상되었다. 준비할 시간은 내일과 모레 오전 뿐. 그것도 짜여진 관광 일정에 끌려 다니다 보면 어찌 될지 모른다. 일단 내일과 모레의 계획은 그 정도로 잡았고, 하나 더 중요하게는 내일 저녁쯤 전체가 모여 5일 뒤의 계획에 대해 회의를 갖기로 했다.
캐쉬캘리는 얼굴에 주름이 많이 잡힌 50대 여성이었다. 사실 말로만 들어온 IPT를 떠올리면 그 모임의 회장이 저렇게 온화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목숨을 내건 사람들의 조직, 화생방전이 일어나더라도 방독면 같은 어떠한 방어 도구도 쓰지 않겠다는 약속, 맨 몸으로 전쟁의 마지막 증언자가 되겠다는 신념……. 암만에서 지낼 때부터 내가 IPT에 대해 들은 이야기는 대충 그런 거였다. 게다가 비자를 기다리느라 많이 지쳐서인지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나 실망이 있기도 했다. 지나치게 폐쇄적인 단체가 아닌가 하는. 그랬으니 내가 떠올린 IPT 회장은 그 느낌에 걸맞는, 다소 과격하거나 급진적인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아니었다. 우리 앞에 선 IPT 회장은 보통의 아줌마, 눈물이 많고 마음이 따뜻한 중년의 여성이었다.
캐쉬캘리는 두 시간 남짓 자신이 겪고 생각하고 느껴온 것들을 이야기했다. 자신의 모국인 미국이 그 동안 이라크에 가한 경제 봉쇄가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했는지, 지난 91년 걸프전 때 이곳의 사람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죽어나갔는지, 그리고 자신이 왜 이 땅의 사람들과 운명을 함께 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했다. 때로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그 때 감정으로 되돌아가서, 때로는 어처구니없어 웃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진심으로 드러내 보였다. 캐쉬캘리는 열 두 살 된 이라크 아이 말을 들려주었다. 공습하는 비행기를 보면서 '나는 어른이 되면 비행기 조종을 배워 미국에 폭탄을 떨어뜨릴 거예요.' 말했다던 아이. 증오가 어떻게 증오를 낳는지, 때로는 그 증오가 얼마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울 수 있는지, 전쟁이라는 것이 어린아이들의 마음에 어떻게 증오를 가르치는지, 그리고 그 증오의 끝은 과연 무엇인지…….
캐쉬캘리는 걸프 전에 참전한 한 병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쟁을 마치고 말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어서 고모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른바 양심 선언을 한 뒤, 감옥에서 살게 된 병사의 이야기. 처음에는 이라크인들을 죽이는 게 너무도 어려웠다, 하지만 몇 차례 되풀이하고 나서는 죽이는 일이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그 당시 우리 미국이 얼마나 잔인한 짓을 한 줄 아느냐……. 나는 전쟁을 겪은 일도 없고, 그 참상을 안다고 감히 말할 수 없지만 온 몸이 오싹할 정도로 끔찍했다. 어제 그제 내가 이 거리에서 만난 아이들, 청년들, 여인들. 마치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듯, 그이들에게 총질을 했다는 말이구나. 나에게 눈빛을 반짝이며 손을 흔들어준 모하메드와 미나, 메이슨, 사보아, 함멧, 아낄, 아딜 같은 아이들에게도 아무 주저함 없이 총질을 했다는 말이구나. 전쟁은 공격을 받는 쪽은 물론이거니와 공격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마저 파괴해버린다. 도무지 양심이나 이성을 지킬 수 없게, 자신도 모르게 사람이 사람을 죽이게 만든다. 그건 내가 될 수도 있고, 내 곁의 그 누가 될 수도 있다.
캐쉬캘리는 IPT 팀으로 함께 들어와 있다가 얼마 전 교통사고로 죽은 한 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퇴임 교사인 그 노인은 마지막 순간 눈을 감으며 이 곳 사람들과 함께 한 순간 만큼 행복한 적이 없었노라 말했다. 캐쉬는 그 말을 기억한다고 했고, 혹시 이 곳에서 죽게 되더라도 자신의 시신을 모국으로 보내지 않을 거라 했다. 이 땅, 자신이 운명을 함께 한 사람들 사이에 눕고 싶다고.
캐쉬는 1980년부터 정부에 세금을 한 번도 낸 일이 없다고 했다. 세금을 내면 모두 무기를 만드는 곳에 쓰는데 그런 세금을 바칠 수 없다고 했다. 몇 해 전에는 핵무기 시설 꼭대기에 꽃을 심었다는 죄로 감옥에 다녀왔다. 벌금형 10000 달라가 나왔지만 그 돈은 여태 내지 않고 있다. 그 돈이 있으면 이곳 아이들에게 약품이나 먹을 것을 보태야지 결국 무기를 만드는데 쓰이게 될 돈을 낼 수 없다고 했다. 지금도 모국에서는 IPT 평화활동가들에게 모두 100만 달러나 되는 벌금을 매긴다고 협박을 한다. 캐쉬는 하나도 과격하지 않았지만 단호했고, 자기 뜻을 설득하고자 하지 않았지만 평온한 얼굴로 감동을 주었다. 흡사 헬렌 니어링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고, 마더 테레사 수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캐쉬는 자신이 이 땅에 와 있는 것이 결코 이라크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했다.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이 이 땅에 온 것은 결국 본국의 사람들을 위하는 일이라 했다. 지난 해 비행기 테러로 빌딩이 다 무너지던 때에도 마침 캐쉬는 미국에 있었다. 이 세상 모든 전쟁과 그것으로 비롯한 끊이지 않는 증오가 남길 것은 끝내 죄 없는 목숨들을 죽게하는 일일 뿐이라느 것을, 캐쉬는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캐쉬가 마지막으로 한 말,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보다 더 위험한 용기가 필요하다'
캐쉬의 이야기가 끝난 뒤 팀원들은 저마다 크게 감동했다. 어떤 대목에서는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고도 했고, 어느 대목에서는 마음이 깨끗해졌다고 했다. 캐쉬는 자신이 겪은 이야기들을 아주 소박하게 들려주었을 뿐이었지만 그것은 어떤 대의를 쫓는 논리나 원칙보다 더 큰 울림을 주었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인 진실의 힘, 함께 아파하고 연민하는 자연의 본성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일지를 쓰고 있는 새벽. 정리 회의를 마친 팀원들 몇이 남아 아직도 토론을 계속하고 있다.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 누가 누구를 설득할 수 없는 문제. 이 일지를 다 쓸 즈음 마루에 나가 신부님 앞에 마주 앉았다. 신부님 눈에 굵은 눈물이 흐르는데 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2003.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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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보다 더 위험한 용기"
-박기범(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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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많이 무거웠다. 요르단에서 체류할 때부터 쌓여온 피로가 겹으로 쌓여있다. 집에서 지내는 거라면 벌써 몸살이 왔을 법도 한데 다행히 그 정도로 풀어지지는 않았다. 절로 버티게 되는 힘, 그것이 우리 팀 안에 있다. 그리고 이곳 이라크에 있다.
어젯밤에는 술을 많이 마셨다. 처음에는 팀장님과 따로 이후 결단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술을 마셨고, 방을 옮겨 혁 선배와 승로가 정부 요원들하고 술을 마시는 자리에 가서 더 마셨다. 여느 때하고 달리 금세 취했다. 마시는 동안에도 내가 취했구나 하는 자각이 있기는 했지만 스스로 제어하지 못했다. 다시 방을 옮겨 팀원들이 모여 있는 신부님 방에서 마셨다.
얼핏 드는 기억에 그 방에서는 전날 밤 신부님이 따로 걱정하던 이야기가 그 자리의 주제인 모양이었다. 긴급하게 예측되는 이곳의 상황, 보이지 않게 다가오는 개전의 분위기…….
계속 쌓이는 피로에 술까지 마셨으니 몸이 천근만근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깊은 잠에 들지 못했고, 서늘한 아침 기운에 눈이 떠지면서 바로 일어났다. 오늘은 아침을 좀 더 서둘러야 했다. 아침을 먹은 뒤 바로 숙소를 옮겨야 했으니 짐을 다시 꾸려야 한다.
아침을 먹고 만소우 호텔을 나와 쟈하라 알 카리쥬 호텔에 짐을 풀었다. 오히려 고급 호텔인 만소우보다 이곳이 더 편안하고 좋은 분위기다. 둘씩 드는 고급 침실이 아니라 넷 혹은 다섯 씩 민박 시설 같은 곳이다. 끓여 먹을 수 있는 부엌이 있어 좋았고, 여러 사람이 모일 수 있는 마루가 있어 좋았다. 우연케도 만소우 호텔에 들던 때부터 우리 팀 사이에 팀웤이 조금씩 흔들린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침실 방에 둘씩 들어 생활해야 한 것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팀원 모두를 존중하면서, 모든 팀원들의 합의를 거쳐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 하지만 팀원들은 저마다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자유롭게 내놓고 이야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 보이지 않게 생겨난 개인 사이의 틈. 거기에 대면 숙소의 문제는 부차적인 거였다. 어쩌면 핑계 같은 것.)
이제 새로 옮긴 숙소에서는 암만에서 생활할 때처럼 아무렇게나 서로의 방에 드나들며 얼굴을 볼 수 있고, 때때로 마루에 모여 얘기를 나눌 수 있다. 어떻든지 이곳에서 우리는 결국 기댈 사람이 여기에 있는 사람들뿐이고, 어떻게든 모든 팀원들이 한 우물에서 나오는 물처럼 마음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관광 일정. 이것 좀 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이라크라는 나라는 전시가 아니어도 본디 외국인 입국이 자유롭지 못한 곳이고, 관광비자로 팀을 짜 들어오면 관광청에 보고를 하고 짜여진 일정대로 움직여야 한다. 빌어먹을! 몸이 무거워 움직이기 싫은 것도 싫은 거지만 지금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기껏 줄맞추어 다니는 관광객이 되어 버스에 실려 다녀야 한다니. 불평해보아야 소용없다는 건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일단 기본적 관광 일정에는 순진한 관광객의 모습으로 충실하면서 정부 요원들의 긴장을 풀어 그 사이에 최대한 할 수 있는 활동을 찾아 하는 것.
운이 좋은 건지 뭔지, 관광 일정을 위해 버스에 오른지 삼십 여 분이 지나 가이드가 오전 관광 일정을 취소해도 되겠느냐 물어왔다. 그 이유란 것이 정부 요원들이 지난 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몸이 좋지 않다는 거였다. 우리로서는 나쁠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따로 자유로운 활동 시간까지 얻을 수는 없었고, 조금 멀리 떨어진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일정 체크를 한 것은, 앞으로 A팀이 요르단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겨우 이틀, 그 이틀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일단 그 사이에 휴먼쉴드나 IPT에서 잡아놓은 행사 계획은 없다. 먼저 오늘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3시부터 IPT 회장인 캐쉬캘리를 숙소에 초대해 간담회를 하기로 약속했다는 것, 나머지 이틀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루 정도는 우리 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이 독자로 준비하는 활동 하나를 하자는 거였다. 바로 내놓은 의견은 어제 우리가 행진을 마친 타흐르 광장에서 우리가 계획했던 페이스 페인팅이나 걸개그림 만들기를 해보자는 것. 몇 가지 우려되는 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기로 했다. 일부러 아이들이나 사람들을 모아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자칫 위험할 수 있으니 우리끼리 걸개를 그리자는 것, 그리하면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비롯한 이라크 사람들이 모여들 거고 그리되면 모여든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함께 만들지는 것.
그리고 한 편에서는 아이들 얼굴에 페이스페인팅을 하고, 또 뒷편 잔디밭에 내려가 아이들과 함께 작은 운동회를 하자는 것. 어제 광장의 분위기나 지금껏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난 느낌에 비추면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예상되었다. 준비할 시간은 내일과 모레 오전 뿐. 그것도 짜여진 관광 일정에 끌려 다니다 보면 어찌 될지 모른다. 일단 내일과 모레의 계획은 그 정도로 잡았고, 하나 더 중요하게는 내일 저녁쯤 전체가 모여 5일 뒤의 계획에 대해 회의를 갖기로 했다.
캐쉬캘리는 얼굴에 주름이 많이 잡힌 50대 여성이었다. 사실 말로만 들어온 IPT를 떠올리면 그 모임의 회장이 저렇게 온화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목숨을 내건 사람들의 조직, 화생방전이 일어나더라도 방독면 같은 어떠한 방어 도구도 쓰지 않겠다는 약속, 맨 몸으로 전쟁의 마지막 증언자가 되겠다는 신념……. 암만에서 지낼 때부터 내가 IPT에 대해 들은 이야기는 대충 그런 거였다. 게다가 비자를 기다리느라 많이 지쳐서인지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나 실망이 있기도 했다. 지나치게 폐쇄적인 단체가 아닌가 하는. 그랬으니 내가 떠올린 IPT 회장은 그 느낌에 걸맞는, 다소 과격하거나 급진적인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아니었다. 우리 앞에 선 IPT 회장은 보통의 아줌마, 눈물이 많고 마음이 따뜻한 중년의 여성이었다.
캐쉬캘리는 두 시간 남짓 자신이 겪고 생각하고 느껴온 것들을 이야기했다. 자신의 모국인 미국이 그 동안 이라크에 가한 경제 봉쇄가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했는지, 지난 91년 걸프전 때 이곳의 사람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죽어나갔는지, 그리고 자신이 왜 이 땅의 사람들과 운명을 함께 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했다. 때로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그 때 감정으로 되돌아가서, 때로는 어처구니없어 웃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진심으로 드러내 보였다. 캐쉬캘리는 열 두 살 된 이라크 아이 말을 들려주었다. 공습하는 비행기를 보면서 '나는 어른이 되면 비행기 조종을 배워 미국에 폭탄을 떨어뜨릴 거예요.' 말했다던 아이. 증오가 어떻게 증오를 낳는지, 때로는 그 증오가 얼마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울 수 있는지, 전쟁이라는 것이 어린아이들의 마음에 어떻게 증오를 가르치는지, 그리고 그 증오의 끝은 과연 무엇인지…….
캐쉬캘리는 걸프 전에 참전한 한 병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쟁을 마치고 말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어서 고모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른바 양심 선언을 한 뒤, 감옥에서 살게 된 병사의 이야기. 처음에는 이라크인들을 죽이는 게 너무도 어려웠다, 하지만 몇 차례 되풀이하고 나서는 죽이는 일이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그 당시 우리 미국이 얼마나 잔인한 짓을 한 줄 아느냐……. 나는 전쟁을 겪은 일도 없고, 그 참상을 안다고 감히 말할 수 없지만 온 몸이 오싹할 정도로 끔찍했다. 어제 그제 내가 이 거리에서 만난 아이들, 청년들, 여인들. 마치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듯, 그이들에게 총질을 했다는 말이구나. 나에게 눈빛을 반짝이며 손을 흔들어준 모하메드와 미나, 메이슨, 사보아, 함멧, 아낄, 아딜 같은 아이들에게도 아무 주저함 없이 총질을 했다는 말이구나. 전쟁은 공격을 받는 쪽은 물론이거니와 공격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마저 파괴해버린다. 도무지 양심이나 이성을 지킬 수 없게, 자신도 모르게 사람이 사람을 죽이게 만든다. 그건 내가 될 수도 있고, 내 곁의 그 누가 될 수도 있다.
캐쉬캘리는 IPT 팀으로 함께 들어와 있다가 얼마 전 교통사고로 죽은 한 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퇴임 교사인 그 노인은 마지막 순간 눈을 감으며 이 곳 사람들과 함께 한 순간 만큼 행복한 적이 없었노라 말했다. 캐쉬는 그 말을 기억한다고 했고, 혹시 이 곳에서 죽게 되더라도 자신의 시신을 모국으로 보내지 않을 거라 했다. 이 땅, 자신이 운명을 함께 한 사람들 사이에 눕고 싶다고.
캐쉬는 1980년부터 정부에 세금을 한 번도 낸 일이 없다고 했다. 세금을 내면 모두 무기를 만드는 곳에 쓰는데 그런 세금을 바칠 수 없다고 했다. 몇 해 전에는 핵무기 시설 꼭대기에 꽃을 심었다는 죄로 감옥에 다녀왔다. 벌금형 10000 달라가 나왔지만 그 돈은 여태 내지 않고 있다. 그 돈이 있으면 이곳 아이들에게 약품이나 먹을 것을 보태야지 결국 무기를 만드는데 쓰이게 될 돈을 낼 수 없다고 했다. 지금도 모국에서는 IPT 평화활동가들에게 모두 100만 달러나 되는 벌금을 매긴다고 협박을 한다. 캐쉬는 하나도 과격하지 않았지만 단호했고, 자기 뜻을 설득하고자 하지 않았지만 평온한 얼굴로 감동을 주었다. 흡사 헬렌 니어링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고, 마더 테레사 수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캐쉬는 자신이 이 땅에 와 있는 것이 결코 이라크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했다.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이 이 땅에 온 것은 결국 본국의 사람들을 위하는 일이라 했다. 지난 해 비행기 테러로 빌딩이 다 무너지던 때에도 마침 캐쉬는 미국에 있었다. 이 세상 모든 전쟁과 그것으로 비롯한 끊이지 않는 증오가 남길 것은 끝내 죄 없는 목숨들을 죽게하는 일일 뿐이라느 것을, 캐쉬는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캐쉬가 마지막으로 한 말,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보다 더 위험한 용기가 필요하다'
캐쉬의 이야기가 끝난 뒤 팀원들은 저마다 크게 감동했다. 어떤 대목에서는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고도 했고, 어느 대목에서는 마음이 깨끗해졌다고 했다. 캐쉬는 자신이 겪은 이야기들을 아주 소박하게 들려주었을 뿐이었지만 그것은 어떤 대의를 쫓는 논리나 원칙보다 더 큰 울림을 주었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인 진실의 힘, 함께 아파하고 연민하는 자연의 본성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일지를 쓰고 있는 새벽. 정리 회의를 마친 팀원들 몇이 남아 아직도 토론을 계속하고 있다.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 누가 누구를 설득할 수 없는 문제. 이 일지를 다 쓸 즈음 마루에 나가 신부님 앞에 마주 앉았다. 신부님 눈에 굵은 눈물이 흐르는데 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2003.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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