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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크게 문을 두드리면 결국 우리는 누군가를 반드시 깨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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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ew3421 (180.♡.211.63) 작성일05-10-14 21:13 조회1,5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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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크게 문을 두드리면 결국 우리는 누군가를 반드시 깨울 것이다
<헨리 롱펠로우>


오는 17일이면 홍성에 내려온 지 만 8년이 되는 날이다. IMF가 오기 전이었던 97년 가을, 당시 다섯살과 세살이던 두 딸과 아내를 데리고 귀농학교 1기 출신의 선배 부인이 ‘귀신이 나올 것 같아’ 이사를 포기한 허름한 농가에 살림을 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십여년간 마을의 노부부에게 임대를 주었던 터라 집의 안팎을 전혀 돌보지 않은 곳이었다. 물은 주방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양동이로 받아다 써야 했고 집을 둘러싼 흙벽은 온전한 곳이 없어 당장에 보수가 필요했다.

이사전 열흘 가까이 벽지와 장판을 바꾸고 보일러를 새로 놓아 최소한의 준비를 마친 후인데도 이사를 도우러 온 동생 부부의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아마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까’ 하는 마음이었으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각박한 도시생활을 접고 그리던 시골에서 첫날밤(?)을 맞은 우리 가족은 농촌에 서의 새로운 출발에 한껏 부풀어 올랐다.

이튿날부터 땅을 파 수도를 주방까지 끌어 들이고 외양간을 멋지게 손 본 후 송아지를 들였다. 대나무에게 점령당한 바깥 마당에는 파묻은 쓰레기며 농약병이 끝도 없이 나왔지만 며칠에 걸쳐 깨끗이 정리했다. ‘지저분하고 낡은 것은 치우고 바꾸면 그만이다. 그대신 이 집은 논밭이 모두 집주변에 붙어 있으니 농사짓기에 얼마나 좋은가’ 라는 게 당시 우리 부부의 속내였다.

그로부터 2년간은 해가 뜨면 논밭으로 나가고 어둑해지면 집으로 돌아와 쉬는 단순한 일과가 계속되었다. 논밭이 마을 입구 큰 길가에 있어 온 동네 주민들의 시선을 받으며 일한 까닭에 무엇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른 봄 첫 농사로 완두콩을 심을 때 “그거 심어 뭐하나? 괜히 고생스럽기만 할 텐데...” 라고 혀를 차던 이웃의 충고가 곧바로 현실로 다가왔다. 경험도 없이 시작한 터널 재배의 어려움은 제쳐 놓더라도 완두콩의 시세가 수확시기에 따라 춤을 추었다. 처음 4kg에 5천원 하던 것이 나중에는 천원까지 떨어졌다. 우리 부부가 한 달내내 완두콩 밭에서 일한 순소득을 세밀히 따져보니 채 30만원을 넘지 않았다.

그 뒤 고구마순, 들깻잎, 고춧잎 등 어느 것을 따봐도 순회 수집상에게 넘기는 값은 시간당 천원 벌이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얼마되지 않는 양을 도시로 싣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넘길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첫해 큰 맘먹고 심은 생강이 풍작(豊作)으로 폭락해 인건비도 건지기 어려운 꼴이 됐다. 논에는 못자리때 동네 분들이 정신없이 도와준 탓에 익음때(熟期)가 다른 세가지 벼들이 줄줄이 섞였다. 벼농사 중간에 논을 말리는 것을 몰라 수확 시기가 왔음에도 논마다 모를 심어도 좋을 만큼 푹푹 빠졌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결국 그 해 1천 5백평을 낫으로 베어 종류별로 가리고 생강은 수확 즉시 파놓은 굴에 저장을 한 뒤 직접 팔기로 했다. 확성기 하나를 사서 도심의 골목골목, 아파트 단지와 홍성 인근의 장이란 장은 모두 쫒아다니며 아내는 트럭 위에서, 나는 밀차에 생강을 싣고 손님을 찾아 나섰다. 베어놓은 벼를 묶어 70년대 방식으로 경운기와 탈곡기를 연결해 바심을 하는 등 농사 첫해 말할 수 없이 고생을 했지만 그 결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 뒤 5년여 동안 첫마음을 잃지 않고 노력해 온 결과 재작년에는 농지가 임대를 포함해 6천 8백여평에 이르고 모두 유기농 인증을 받았다. 비록 중고로 시작했지만 트랙터 콤바인 등 농사에 필요한 농기계도 빠짐없이 갖추었다. 아직은 귀농 후배가 농가 살림을 물어올 때 ‘돈도 없지만 돈 쓸 시간도 없다’ 고 답하지만 첫 해의 두 배 이상은 된다. 하지만 돈을 생각했으면 이 고생을 하러 농촌에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입만을 따진다면 농사보다는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는 편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부들, 특히 유기농을 고집하는 농사꾼들의 작물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땀과 꿈이 깃들어 있다. 그러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같은 농산물을 받아들 소비자들을 생각해 힘들어도 멈출 줄을 모른다. 때문에 이 땅에서 유기농의 대부(代父)로 불리는 분들은 고된 노동으로 인해 거의 심각한 농부증에 시달리고 있다.

건초염이라 했던가? 아내는 귀농 4년만에 고된 호미질로 인해 손가락 인대 하나를 끊어내는 수술을 받았지만 그래도 ‘농촌에 뼈를 묻겠다’고 한다. 나 또한 올해 초 생협에 입사한 뒤 농사와 생협 근무를 병행하고 있다. 특히 요즈음에는 일주일에 두 세 번씩 소비지 생협을 오르내리며 쌀소비 촉진 강연을 하는 등 강행군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생협의 쌀적체는 연말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쌀 재협상에 따른 국회 비준과 칠레와의 FTA, 유기 농산물 소비 적체 등 농촌이 갈수록 살기 어려운 곳이 되어 가지만 이제껏 희망의 끈을 놓아 본 적이 없다. 언제 농촌이 어렵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홍성의 생산자들은 그간 우리쌀 지키기 소비자 1만인대회 행사의 일환으로 시작된 쌀강좌를 통해 소비자들의 호응에 큰 힘을 얻고 있다. 어느 때는 강당에서 하기도 하고 때로는 열 분도 안되는 소비자를 모시고 진행한 적도 있지만 늘 고맙고 감사한 마음뿐이다. 오늘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매우 어렵지만 “오래도록, 크게 문을 두드리면 결국 우리는 누군가를 반드시 깨울 것이다”는 헨리 롱펠로우의 명언이 늘 함께 하기 때문이다.


전투기들의 공중전(空中戰) 기법중 ‘편대전술’ 이라는 것이 있다. 보통 전투기 한 대가 기관총을 쏘면 격추 유효 반경이 2.5m 불과하지만 두 대가 편대를 이루면 그 백배인 250m로 늘어난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농촌과 도시에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각기 제한된 역할을 해왔지만 위기를 기회로, 양 주체가 새롭게 편대를 이루어 나아간다면 현재의 위기는 쿠바가 그랬듯 다시 없는 변혁의 기회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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